역사 속의 이슬람

역사 속의 이슬람

1. 들어가는 말
  이 글을 올림에 있어 주안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제목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와 이슬람과의 교류를 역사적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이 글을 올리고자 하는 필자가 역사학도가 아닌 까닭에 그리고 역사학의 개론서나 방법론조차도 일변하지 못한 이슬람에 관심있는 단순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행여 생길 수 있는 무지와 잘못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고자 하는 모든 분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준비로 이 글을 마련한다.
 이 글을 준비하는 데 있어 필자의 머리 속에 떠나지 않는 한 가지의 사실이 있다면 준비하는 데 참조한 한 논문에서 읽은 토인비의 말이다. '어떤 문화든지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생적으로 성장,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이질적인 문화간의 접촉은 필연적이다.' 비록 우리나라와 이슬람의 지리적 거리감이라든지 그 문화적 차이가 크다고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 옛날 언제인가 부터는 접촉이 있었으며 아직은 연구 작업이 없었던 까닭에 그 때의 구체적인 상호 간의 영향은 이 글에서도 밝히지는 않았다 해도 근대에 들어서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늘어나기 시작한 교류는 분명코 아직 우리에게는 미진하다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낀다. 이슬람이 점점 더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종교임-이 사이트의 다른 글 참조-을 감안하면 앞으로의 우리나라와 이슬람의 관계는 아랍이라는 한계를 벋어나 한 종교로서 사상으로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종교란 사회의 모든 제도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고 종교는 사회 체계의 일부로서 모든 정치, 경제적 조치, 가족 유형, 기술적 지식, 그리고 사회 공동체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영향을 주기도 한다.' 라는 저명한 종교 사회학자인 밀터 잉거의 말에서 보듯 종교는 인간의 의식 구조 중 하나로서 사회와 문화의 가장 의미있는 측면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문화 영역 중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종교를 주축으로 다양한 문화 사이의, 인간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져 왔음은 역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슬람을 하나의 아랍 문화와 별도로 종교로서 본다면 앞으로의 우리나라의 문화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증가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재물로 한국에서의 이슬람의 발전요소, 문제점을 가까운 시일 내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2. 우리나라와 이슬람의 교류.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60년 전, 아라비아 반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무함맏의 선교가 시작되어 634년에는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시키고 세계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이어 642년에는 페르시아에, 651년에는 당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멀리 이제 막 통일을 이룬 한반도와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무슬림들이 한반도와 접촉한 최초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서력 661-935)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당과의 협력으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또한 그만큼이나 당나라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게에서 광범위하게 고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당시 중국의 남동부지역에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무슬림들은 지역적인 근접성을 이유로 바다 건너의 신라와 접촉할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이 구체화되어 역사에 기록된 것은 우선 신라 사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슬림 사가들에 의해서이다.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드비에 의해 쓰여진 "키타브 알 마살릭 왈 마말릭"은 한반도에 무슬림 진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 지 알 길이 없다."
 이상의 기록에서 추론되어지는 가정 중에 하나는 처용에 관련되는 것이다. 곧 처용이 무슬림 상인이었다는 설인데, 위의 기록과 삼국사기등에서 처용은 4명의 일행과 함께 외국에서 상륙하여 나머지는 사망하고 처용만이 생존한 실제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여 처용의 무슬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상의 이슬람측 기록과는 달리 한국측 기록에 나타난 무슬림들과의 최초 접촉시기는 11세기초 고려시대 초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현종 15년 (1024년) 9월에 열라자(Al-Raza)등 100여명, 다음 해 하세라자(Hassan Raza) 등 100여명과 정종 6년 (1040년) 11월에 보나합(Barakah)등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9월에 Tashi라는 이방국에서 Hasan, Raza와 다른 수 백 여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
 이들은 대식(중국음으로는 Tashih로서 아랍어의 타-지르-상인-에서 유래한 당송시대의 음역)국에서 온 사람들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전형적인 무슬림들이다. 대식이라는 명칭은 12세기에 들어와 회회(중국음으로는 Hui-Hui)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는 데 이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 명칭이 회교 또는 회회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칭이 오늘날 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이 이슬람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들은 이상과 같이 국제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무슬림들을 부르는 당시의 명칭 곧 대식으로도 음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여말선초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원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관리와 함께 원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 아시아 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의 이식에 기여하였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원이 존재하였으며 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꾸란 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기도 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의식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 의식들이 그 어떤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뒤바침할 만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여인과의 결혼이나 주위 한국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적 핵심요소들이 한국 사회에 유포되고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결혼을 통한 접촉과 동화의 예는 흔히 오늘날 덕수 장씨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회회인 삼가(Samga)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 충렬왕의 부인이 된 원 공주를 따라 1274년 한국에 온 시종들 중에서 아랍인(혹은 위구르인이라는 설도 있다) 삼가라는 인물이 있었는 데,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한국 여인과 결혼해서 충렬왕에 의해 장순룡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결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동화된 무슬림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선조가 되었고 당시 이름은 1277년 왕명에 의해 바뀌어 지게 되었다. 지금도 덕수 장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가문의 선조가 아랍에서 온 무슬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 가문의 후손들은 50.000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삼가라는 인물의 출처에 관해 그가 아랍인이었는지 터키계 위구르 무슬림이었는지에 대해 의견들이 있다. 위구르 무슬림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조선 초의 기록들에서 보이는 무슬림들의 궁중 의식 참여와 사역원의 외국어 시험 과목이 위구르어 였으며 공식 외국어로서의 위구르어가 교습되었음을 감안한 것이다.
 많은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당시 사회에 이슬람적 영향을 끼쳤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이슬람력(히즈라)의 도입과 사용의 흔적이다. 세종이 농업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 역법을 정비하고자 했을 때 종래 중국의 역법은 낡고 오차가 심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중국에서 회회역법(이슬람력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여법을 완성하니 그것이 바로 순 태음력인 칠정산외편이다. 다시 말하면 칠정산외편은 세종이 완비한 한국식 이슬람력법인 셈이다. 이 외에도 조선 초기의 과학기기 발명과 과학 서적 편찬에 관련된 많은 이슬람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후 한반도와 이슬람의 교류관계는 급격히 냉각되고 만다. 이는 대체로 15세기 이후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지리상 발견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금까지 교량적 무역을 담당하던 아랍 무역권의 쇠퇴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명의 건국에 따른 유교 사상의 부흥이 있었는 데 이와 함께 무슬림들의 상대적 역할 감소가 두드러졌다. 한국과 중국과의 긴밀한 역사적 유대관계로 볼 때 이같은 중국 대륙의 변화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1427년 유교주의 이념에 따라 이질적 문화요소에 대한 일대 소탕이 이루어 졌고 여기서 무슬림들의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중국에 등장한 청조의 무슬림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유럽 해상세력이 무슬림 세력을 압도하는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도 한반도에서의 무슬림들의 고립화와 단절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절연의 시기는 20세기 초의 개화의 물결이 일어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무슬림들과 한국인들이 재 접촉한 곳은 만주와 서울이다. 일제가 만주경영을 위하여 한국인들을 반 강제로 만주에 이주시킨 한국인의 수는 100만명에 달하였다. 이 중 몇몇 한국인들은 무슬림들과의 접촉하였는데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무슬림들과 접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불가능하다. 그 당시 만주에서 살면서 이슬람과 접촉했던 무함맏 윤 두영, 하지 서브리 서 정길, 하지 우마르 김 진규 등은 당시에 많은 한국인들이 이슬람의 탄탄한 교리에 매료되어 새로 무슬림이 되었으며 만주에 많은 이슬람 성원들과 이슬람 공동체(움마)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1920년대 이 후 한국 동란에 이르기 까지 이슬람과 한국의 또다른 접촉은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한 터키계 러시아인들이 한국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무슬림들 중 200명 정도가 한국에 영구 정착하였다. 이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한국의 터키계 무슬림들은 곳곳에 흩어지게 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주로 상업과 만주-일본을 있는 역내 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mahall-i Islamiye'라 불리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그들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서울 시내 요충지에 민족학교와 이슬람 성원을 건립함은 물론 꾸란을 출판 배포하고 서울 홍제동 근처에 이슬람 묘지까지 확보하여 근대 한국 이슬람의 태동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압둘 하미드 김현철)    
*이 주제에 대해 참고하실 문헌
'온 세계에 이슬람의 빛을',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 1980.
유 정렬, 한국 무슬림에 대한 연구, 한국 외국어 대학교 중동 문제 연구소 연구 논총-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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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위, '이슬람 문화사', 문학 예술사, 서울-1981.
최 상수, '한국과 아라비아와의 관계', 어문각 출판사, 서울-1971.
이 용범, '처용의 아라비아 상인인가', 한국 외국어 대학교 출판부, 서울-1980.
이 희수, '볼세비키 혁명과 러시아 투르크 무슬림들의 한반도 이주', 한국 이슬람 학회 논총, 제 1집, 1990.
------, 'Islam in Korea', 한국 이슬람 학회 논총, 제 4집, 1994.
------, '한.이슬람 교류사', 문덕사, 1991.
Fouad Abd El-salam Elkhazindar, '이슬람의 한국 전파와 韓國의 무슬림의 실태 조사 : 서울.부산.광주(경기도)지역을 중심으로', 학위논문(석사) - 慶熙大學校 大學院 : 國民倫理學科 社會學專攻,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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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ww.islamkorea.com\islamkorea_histor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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